넷째 동생이 짓는 김인중미술관
-다시 브리우드현상(Brioude Phenomen)을 염원하며-
김억중[건축가, 한남대 명예교수]
현대 미술의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화가로서, ‘빛의 사제’, 그리고 ‘스테인드 글라스의 왕’ 이라는 애칭의 재불 작가 김인중[1940년 부여출생, 호(號)/일죽(一竹)]은 유화와 스테인드글라스화를 비롯하여 근래에는 세라믹 작품을 소개하며 창작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프랑스 미술사학자 드니 구타뉴(Denis Coutagne)는 김인중에 대해 회화에서는 인상파 Paul Cezanne, 스테인드글라스에서는 야수파 Henri Matisse, 도자기에서는 입체파 Pablo Picasso를 계승한다고 평했다. 그러나 내적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김인중은 누구의 양식도 답습하지 않으며 새로움을 향한 과감한 시도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펼치고 있다. 김인중이 그림을 시작한 지는 반세기가 지났으며 유럽에서 그의 예술 활동 경력은 50여년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이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줄리앙 그린 (Julien Green, 1900-1998)은 1996년 처음으로 출간된 김인중의 화집 "미지세계의 편린"에 "색깔의 꿈"이라 는 제목으로 서문을 썼다. 그의 작품세계는 색과 선의 율동폭을 극대화한 동양화이자 서양화라는 찬사와 아울러 세계 곳곳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이 종교적인 차원을 너머 범세계적으로 널리 인정받는 이유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현대의 메마른 영혼들에게 평온함은 물론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김인중은 유럽에서 50여 년간 200여 회 전시회 개최, 저술활동, 언론매체 출연 등 적극적인 예술활동을 통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 분야에서 괄목할 성과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대표작으로 프랑스 브리우드 바실리카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꼽을 수 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사계의 극찬을 받은 스테인드글라스 제조 공법의 창안이다. 또한 그는 프랑스 문화훈장 오피시에를 수상하면서 한국인으로서 국위를 선양한 바 있다. [출처 : 갤러리미]
화가 김인중은 내게 큰 형님이시지만 혈연 이상으로 매우 특별한 인연으로 얽혀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 선뜻 건축가의 길을 걷게 하셨으니 참다운 리더에 다름 아니었으며 또한 그 길을 어떻게 걸어야할 지 몸소 보여주셨으니 내겐 든든한 롤 모델이었을 뿐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아름다움을 더 넓고 크게 실천하는지 서로를 냉정하게 견주어보아야 할 라이벌 관계로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인 내가 큰 형님으로부터 특별하게 받았던 은혜의 크기와 깊이를 가늠해보면 이를 무엇으로 어찌 다 되돌려드릴 수 있을지 늘 안타까운 마음만 간직했을 뿐 덧없는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던 2년 전 겨울, 참으로 오랜 만에 말로만 전해 들었던 큰 형님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직접 보러 프랑스 브리우드 성당으로 향했다. 평가부터 인증과정 모두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슐랭 가이드[Michelin Guide] 2017년판에 브리우드[Brioude]라는 프랑스 중남부 도시를 검색해보니 도시를 대표하는 성당 생 쥴리앙 바실리카[St. Julien Basilique]가 최고 평점 별 3개를 받아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브리우드는 중소규모지만 최강의 매력 있는 관광도시로 공인받은 셈이었다.
놀라운 것은 큰 형님의 스테인드글래스 37점이 설치된 이후 그 평가가 별 셋으로 상향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한동안 폐허수준으로 방치되었던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 형용하기 어려운 빛과 색의 오묘한 조화가 담긴 큰 형님의 스테인드글래스 작품과 함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상생하는 아름다운 명소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현장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요컨대 한국화가 김인중의 마법 같은 손길이 프랑스 한 도시의 역사를 일거에 뒤바꾸어 놓았던 셈이다. 브리우드 현상(Brioude Phenomen)이라 할까, 뛰어난 예술작품이 도시재생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던 사례라는 점에서 건축가인 나로선 구석구석 관심 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미슐렝가이드에 표시된 등급[별 3개] : 브리우드 셍쥴리앙 바실리카
브리우드 셍 쥴리앙 바실리카/ 김인중 스테인드글라스 37점 배치현황
브리우드 셍 쥴리앙 바실리카/ 김인중 스테인드글라스 2점
그 날 그 벅찬 감격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2010년 초부터 브리우드시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주관했던 장 자크포세[Jean-jaquea Faucher] 시장은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를 통해 큰 형님께서 도시의 변화를 이끌어낸 주역이었다는 점에 대해 존경과 고마움을 표현하였다한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국제공모 작품 53점 중, 큰 형님 작품이 최종 선정되었지만 이국작가라는 이유로 적지 않은 진통을 겪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원안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화가의 작품이 지닌 차별화된 예술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납땜으로 조각유리를 이어붙이는 전통기술에서 확연하게 벗어남은 물론 마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이나 알프레드 마네씨에[Alfred Manessier, 1911-93] 같은 근, 현대 작가를 뛰어넘어 최소한의 후레임을 적용한 스테인드글래스 혁신공법을 기반으로 하여 수묵화 같은 그만의 고유한 예술세계가 고요와 침묵 속에 깃들었던 천년 성당을 찬란한 빛과 색으로 물들이라는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당시 관계자들의 그런 예측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으며 설치가 마무리 되자 냉랭했던 주민들의 반응도 뜨겁게 뒤바뀌었다고 하니 과연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도스토에프스키의 명구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좌로부터 중세[14세기] 마크샤갈[1887-1985] 마네씨에[1911-93] 김인중[1940-]
브리우드를 비롯해 유럽 곳곳에 45군데 큰 형님의 스테인드인드글라스 작품이 설치되어 있지만 다 둘러 볼 수 없어 우선은 큰 형님을 뵈러 서둘러 파리 수도원으로 돌아 가야했다. 수도원 근처 몽쏘 공원[Parc Monceau]에서 틈나는 대로 캐치볼을 즐겨 하실 만큼 야구를 좋아했던 스포츠맨으로서 체력 만점에다 언제 보아도 구김살 없는 동안의 청년이셨는데, 그 날 수도원 침침한 복도에서 햇빛을 뒤로하며 노구를 지긋이 끌며 나오시는 분이 설마 큰 형님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균형이 무너진 몸매가 역력해지신 큰 형님을 너무 늦게 찾아뵈었다는 회한과 함께 큰 형님을 위해 아무런 노력을 하지 못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고 아버지 같은 형님에게 내가 바로 ‘불효자’라는 생각에 몸서리쳤다.
여쭈어보니 이렇다 할 수장고가 없어 유럽 곳곳에 당신의 분신 같은 천 오백여 작품들을 믿는 이들이나 단체에게 맡겨놓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어떤 이는 작품을 임의로 처분하거나 어떤 이는 뜬금없는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하는데다 어떤 이는 갑자기 공간을 비워달라는 등의 날벼락 같은 소식을 연이어 접하며 스트레스가 누적된 탓에 건강을 크게 해치실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날 이후 큰 형님께서 건강을 되찾아 작품에만 전념하실 수 있도록 하려면 빠른 시일 안에 어떻게든 국,공립 미술관을 찾아서 작품 수장과 관리부터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분주했다.
그렇다면 김인중미술관을 어느 곳에 유치하면 좋을까? 늘 자신을 백제인이라 부르셨던 큰 형님께서는 부여, 공주, 논산, 대전 어디든 좋다 하셨다. 내심으론 브리우드 현상을 기대하며 전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들이 들어갈 미술관을 지자체간에 서로 유치하겠노라며 선의의 경쟁이 있기를 기대 해봤지만, 해당 지자체로부터 여러 가지 여건상 유치가 어렵다는 입장을 직, 간접으로 들었다. 할 말도 많고 매우 섭섭하기는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던 미술관 프로젝트를 멈출 수는 없었다. 실은 큰 형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나와 함께 경당이든 미술관이든 뭔가 특별한 작품을 함께 하기로 결의하셨는데, 드디어 그 꿈을 실현할 차례가 왔으니 되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사립미술관이지만 정성을 다해 제대로 된 건축물을 짓고 미술관 일대를 매력 있는 장소로 만들어 우리 지역의 문화 인프라 구축은 물론 관광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아주미술관을 설계하고 준공한 경험을 통해 사립미술관 설립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일인 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마주치게 될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며 뜻을 공유해주실 가족은 물론 든든한 친지 분들이 포진하고 계시다. 끝으로 김인중미술관 재원조성부터 건축 등에 이르기까지 실무 작업에 매진할 (주)일죽메세나의 MVP(Museum Value-sharing Project)에 각별한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